마른 나뭇가지 꺾어 지팡이를 만드니 착取枯枝仍作杖

떨어지는 단풍잎 길에 자리를 편다 藉來寒葉卽爲筵

멀리 북쪽 언덕으로부터 걸어내려 온다 北園高處遙遙下

느릿느릿 남쪽 맑은 연못에 이르기까지 南沼晴時緩緩前

온종일 바윗가 소나무 구경하노라니 石上寒松看盡日

멀리 기럭소리에 또 한해가 지나간다 天邊歸안聽餘年

지나는 사람들의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까 閑來錯被傍人道

‘저 사람 잠랑 아니야’, ‘아니야 신선일거야’ 不是潛郞是散仙

-저암 유한준(1732~1811)의 ‘산보’(散步, ‘자저(自著)에서)


출처 : 경향DB



‘산책’과 ‘산보’는 같은 뜻이다. 굳이 한자로 구별한다면 지팡이(策)를 짚었으면 산책이고 그냥 걷으면 산보다. 산보든, 산책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편한대로, 느릿느릿, 내키는 대로 걷는 것이다. 그래서 한보(閑步)이고, 만보(漫步)이다.

산보하기 좋기로는 가을만한 계절이 없다. 옛사람들은 가을 중에서도 늦가을, 만추를 최고로 쳤다. 하늘 높고, 날씨 청량할 때 마른 나무 꺾어 주장자를 짚고 집밖을 나선다. 산상(山上)의 수목들이 노랗게 물들고, 노변(路邊)의 나무들이 붉은 잎을 떨어뜨리며 양탄자를 깔아놓았다. 높따란 동산, 맑은 연못가. 내키는 대로 걷다가 바위 위의 소나무에 한참 시선을 주는데, 기러기 소리에 올 한해가 지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소요하는 나를 두고 누구는 잠랑(潛郞:때를 만나지 못한 기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산선(散仙:벼슬자리 없는 신선)이라고 한다. 이 가을, 누구든 산보하는 순간만은 잠랑이고 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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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