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휴가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지난주 휴가를 얻고 보니, 혼자였다. 이틀을 빈둥대니 슬슬 역마살이 발동했다. 퍼뜩 풍도(豊島)가 생각났다. 두 해 전 갑오농민전쟁 120주년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섬의 사연을 처음 접했다.

1894년 7월25일 경기 안산시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군 함대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고승호의 병사 1000여명과 선적 화물은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인양 유물 일부는 목포 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 중이다). 풍도해전.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화이질서라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세를 균열시켰다.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은 중국을 대신해 맹주로 등장했다. 조선·중국 등 나머지 국가들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했다. 풍도는 그 역사의 빗장을 열게 해줄 비밀의 섬이다. 이후 휴가 때면 그 섬을 떠올리곤 했다.

풍도는 60여가구, 주민이 150명 남짓한 작은 어촌이다. 이름과 달리 마을은 결코 풍요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풍도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이 지천으로 깔려있어 일찍이 야생화 군락지로 소문이 났다. 봄철이면 들꽃을 탐하는 동호인과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반면 다른 철에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 섬 전체가 산으로 이루어진 데다 변변한 해수욕장 하나 없기 때문이다. 늦여름의 풍도가 한가한 것은 당연한 일일 터. 풍도에 내리니, 어촌은 평온하다 못해 권태롭기까지 하다. 마을 앞 그늘에 평상을 펴고 담소를 나누는 촌로 몇몇이 눈에 띄는 정도다.


서해 낙도 풍도분교에서 바라본 바다의 바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_경향DB



풍도를 가려면 최소 하룻밤은 머물러야 한다. 하루 한번 인천에서 정기 여객선이 오가지만, 기항한 뒤 바로 떠나기 때문이다. 1박2일을 어떻게 보낼까. 탐화(探花)도, 해수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풍도의 기억’을 찾아보기로 했다. 첫날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섬 둘레는 5㎞ 남짓. 해안도로는 절반도 안되고, 나머지는 천연 해안선이다. 해안산책로에는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다. 방파제 모양의 가드레일에 풍도의 자연, 역사, 민요, 주민의 에피소드 등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섬의 역사가 1만년이고, 가을에는 섬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고, 한때 섬주민들은 전복 양식으로 자식을 가르쳤다는 등등. 섬 이야기가 가득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풍도에서 시작됐다는 글귀도 보인다. 경기문화재단 ‘문화활생 공명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풍도해전’은 프로젝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해안선에도, 소라를 따는 어민들에게도 청일전쟁의 기억은 없었다.

포구 뒷산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120년 전 풍도해전의 포연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없다. 근처 땅콩밭을 매던 촌로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74세인 그는 이틀간 만난 주민 가운데 풍도의 기억을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풍도를 점령한 뒤 섬 정상인 후망산에 ‘청일전쟁 승전 표석’을 세웠는데, 동네 사람들이 뽑아버렸다고 했다. 풍도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것은 이곳이 서해 바닷길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라는 지리적 특성도 설명했다. 또 한때 일본인들이 버릇처럼 떠들고 다녔다는 “동해의 독도, 서해의 풍도”라는 말도 전했다.

일본이 풍도해전으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독도를 강제편입한 역사를 생각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섬을 떠나는 날, 풍도 선착장 한쪽에 설치된 ‘풍도 소망탑’을 발견했다. 전날 섬에 들어갈 때는 보지 못한 낮은 돌탑이었다. 그 앞 표지판에는 “풍도는 청일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풍도해전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 소망탑은 풍도의 아름다움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소망을 표현하며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3년 전 경기도에서 세운, 풍도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어둡고, 부끄러우며, 아름답지 못한 역사는 기억에서 지우려 애를 써왔다. 청일전쟁은 그 가운데 하나다. 고교 세계사 교과서에 청일전쟁에 대한 기술은 몇 줄에 불과하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갑오농민전쟁과 그것에 이어지는 내정개혁의 항목에 부수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한국사 전공 학자 가운데 청일전쟁 연구자는 거의 없다. 조선과 동아시아를 흔들었던 청일전쟁에 대한 무관심은 네거티브 역사에 대한 의도적 회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이자, 장소에 의미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미나마타병을 고발한 소설 <고해정토>를 쓴 이시무레 미치코는 “어떤 장소의 ‘물거울’이 우주를 비춘다”며 장소성을 강조했다. 독도가 그렇듯이 풍도 역시 우리 근대사를 비춰볼 수 있는 ‘물거울’이다.


조운찬 |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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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