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인 17일, 헌법을 읽었다. 시중에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든 해설서가 여러 권 있지만, 내가 읽은 텍스트는 헌법재판소에서 국민 보급용으로 펴낸 <대한민국헌법>이라는 법령집이었다. 이는 작은 책자로 되어 있어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헌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헌재의 노력이 엿보인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의 정신과 취지, 방향을 담은 도입부다. 민주개혁, 평화통일, 기회균등, 국민생활 향상, 세계평화 등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숨이 막힌다. 전문은 글자 수 341자, 원고지 2장 분량인데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문장 가운데 가장 길다. 주술 관계 등 문법에도 맞지 않는다.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누구나 아는 조항인데, 얼마전 유승민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나면서 “정치생명을 걸고” 지키고 싶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민주공화국.’ 이 다섯 자에 실린 무게는 엄청나다. 서구에서 수입한 정치체제로 치부할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1조1항의 성립 역사에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압축되어 있다. 이 짧은 문장이 헌법에 들어가기까지 수만명의 독립운동가의 투쟁과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다(박찬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_경향DB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모아놓은 제2장은 읽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헌법의 규정대로 개인의 인권은 누구에게서도 침해받아서는 안되고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를 져야 한다. 현행 헌법은 여기에 행복 추구권,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환경권까지 보장하고 있다. 헌법에 인간의 기본권이 명문화됐으니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하나둘 열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법 조문은 현실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당위이다. ‘평생교육 진흥’이나 ‘최저임금제 시행’ 규정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18조)는 조항을 읽으니 잇따라 폭로되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불법 사찰, 해킹 프로그램 매입·공작이 얼마나 반헌법적 행위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국가기관이 정권의 창출과 유지를 위해 자행한 이런 행위를 어떻게 묵과할 수 있을까.

근로의 권리와 의무 조항에는 ‘여성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제32조 4항)는 구절이 있다. 이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전날 다큐멘터리영화 <위로공단> 시사회에 다녀왔기 때문일 게다. 임흥순 감독은 이 영화에서 1960~1970년대 청계천 봉제공장과 구로공단에서 최근 한진중공업, 기륭전자의 농성투쟁까지 반세기에 걸친 여성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인터뷰와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해 은사자상을 받은 화제의 영화다. 여기에 출연한 한 여성노동자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울먹이면서 자신을 ‘워킹푸어’라고 말했다. 노동의 현실과 헌법 조문 사이의 거리는 이토록 멀다.

제헌헌법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최악은 박정희 장기집권의 길을 튼 1972년 유신헌법이었다. 다행히 민주화투쟁으로 헌법 개정을 이끌어내면서 현재의 국민헌법을 갖게 됐다. 1987년 개헌헌법, 즉 현행 헌법은 9차례 개정을 거친 헌법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각에서 헌법 개정논의가 일고는 있지만, 현재로서 최선의 헌법인 것은 분명하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개개인이 헌법의 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일이다. 현행 헌법에는 민주주의와 인권뿐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가 담겨 있다. 헌법의 조문만 읽어도 우리의 권리를 찾아 행사할 수 있는 눈을 틔울 수 있다.

지난 3월, 나는 ‘경향시민대학’에서 김종철 연세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헌법을 처음으로 읽었다. 그 때 김 교수가 “헌법의 핵심 내용은 시민의 기본권”이라며 “인권 신장을 위해서는 헌법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학창시절,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도록 강요받았지만, 헌법을 읽으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헌법이 체제유지 수단이 됐던 때였으니 그렇다고 치부하자.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헌법에 눈을 돌릴 때가 됐다.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헌법 읽기 붐이 일었다고 한다. 헌법을 읽으면 한국 사회가 보인다. 마침 대한민국헌법을 파괴하고 유린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을 만든다는 소식도 들린다. 67주년 제헌절을 보내면서 대한민국헌법 읽기 운동을 제안한다.


조운찬 |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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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