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1916~1956)은 노매드였다. 호는 ‘대향’(大鄕). ‘덕지덕지 아들딸 많이 낳아서 그놈들과 대향촌(큰 고을)을 만들어’ 정착하고 싶은 게 중섭의 꿈이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전쟁과 가난으로 그는 끊임없이 떠돌았다. 현해탄은 가족을 갈라놓았다. 평양 출신 중섭이 일본 도쿄-원산-부산-제주-통영-진주를 거쳐 서울에 거처를 마련한 것은 1954년 7월, 나이 39세 때였다. 그러나 서울 역시 유랑인의 한 여정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60-202번지. 중섭의 작업실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인왕산 아래였다. 원산 출신 지인이 내어준 이층집 방에서 그는 그림에 몰두했다.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끝없이 “열심히 그리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집이 팔리면서 마포 신수동의 이종사촌 집으로 옮겨야 했다. 계속되는 더부살이였지만 그의 작업은 계속됐다. 누상동과 신수동 시절, 중섭은 ‘도원’, ‘길 떠나는 가족’, ‘닭’ 연작과 같은 명품을 쏟아냈다.

1955년 1월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이중섭개인전이 열렸다. 중섭의 예술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첫 공식 개인전이었다. 화단의 평가는 좋았다. 그러나 첫 개인전은 중섭에게 큰 시련을 안겼다. 출품작 중 몇몇 그림은 외설스럽다 해서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45점 출품작 가운데 20여점이 팔렸지만 그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중섭은 남은 그림을 갖고 대구로 내려갔다. 4월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두 번의 전시는 화가 이중섭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번에도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서 중섭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이후 중섭은 정신분열증상에 영양실조, 간염이 겹치면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중섭의 최후의 거처는 병실이었다. 정신분열증이 심해지면서 그는 대구와 서울의 병원을 전전했다. 일 년의 투병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끝이 났다. 중섭이 숨지던 1956년 9월6일,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은 그를 ‘무연고자’로 처리한 뒤 영안실에 안치했다. 중섭의 시신은 뒤늦게 부음을 들은 친구들에 의해 화장된 뒤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중섭은 스스로를 ‘화가’가 아니라 ‘화공’으로 칭했다. 평생 그림만 그리고 살고 싶은 우직한 화공이었다. 그리지 않고는 한시도 배겨내지 못했다. 어눌했던 그에게 그림은 ‘말의 또 다른 수단’이었다. 편지를 쓸 때에는 엽서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종이가 없을 때에는 담배 은박지를 사용했다. 새해 초부터 경복궁 옆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에서는 그릴 줄밖에 몰랐던 화공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주 전시장을 찾았다. 중섭의 대표작 ‘길 떠나는 가족’과 같은 유화 이외에 편지 20여점,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은지화(은박지 그림)까지 나왔다. 편지는 이중섭이 일본에 사는 아내와 아들에게 보낸 엽서화이고, 은지화 역시 가족이 주제이다. 일본어로 쓰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배어 있었다.

눈이 쌓인 망우리 공원묘지에 화가 이중섭, 만해 한용운, 시인 박인환, 아동문학가 방정환, 소설가 계용묵, 안창호, 순조의 딸 명온공주 등이 서울 둘레길로 변모한 이곳에 묻혔 있다. (출처 : 경향DB)


주말에는 망우리 공원의 이중섭 묘지를 찾았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산 57번지. 이곳에는 이중섭 이외에도 한용운, 이인성, 방정환, 오세창, 문일평, 지석영, 조봉암, 박인환, 최학송 등 수십명의 문화예술가·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대부분의 유명인 묘지에는 산책로 옆에 연보비나 기념비를 설치했으나 이중섭 묘지에는 어떠한 표지도 없다. 힘들여 찾아간 묘지는 북적대는 화랑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묘지는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 있었다. 잔디가 자라지 않는 봉분은 생전의 고인처럼 고단하고 을씨년스럽다. 103535라고 쓰인 묘지번호판은 뽑혀 있었다. ‘大鄕李仲燮畵伯墓碑(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쓰인 작은 조각비가 없었다면 무연고 묘지라고 지나치기 십상이리라. 망우리의 유명인 묘지 가운데 이중섭만큼 소홀히 관리되는 곳은 없다. 한용운의 묘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것은 논외로 치자. 화가 이인성의 묘지에만 해도 이력을 적은 비석이 2개나 세워져 있다.

내년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이다. 미술관이나 지자체 등에서 기획전을 열고 학계의 조명 작업도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나 ‘황소’와 같은 수십억원대를 호가하는 몇몇 작품에만 눈을 돌릴 게 아니다. ‘국민화가’, ‘천재화가’라는 환호 뒤에 가려진 ‘정직한 화공’ 이중섭을 드러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망우리 공원에 이중섭 기념비와 안내판을 세우고 종로 누상동 가옥 입구에 작은 표지를 설치하는 것을 제안한다.


조운찬 |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