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헌장 제정은 통일준비위원회가 주도하고 헌장의 주체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지난 27일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공개세미나에서 제성호 중앙대 교수가 통일헌장 준비 과정을 발표했을 때, 방청석에 있던 나는 순간 타임머신을 탄 듯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 이듬해 학교에 들어간 우리들이 교육헌장의 암송을 요구받은 것은 유신 체제가 선포된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헌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한 단락, 한 단락을 외우게 한 뒤에야 하교를 허락했다. 나도 몇 차례 귀가 시간을 늦춰가며 외우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외울 수 있었다. 그렇게 긴 글을 암송한 것은 처음이었고, 지금까지 그때와 같은 암기 능력을 발휘해본 적이 없다. 나는 지금도 헌장의 전문이 394자이고, 마지막이 ‘1968년 12월5일 대통령 박정희’로 끝났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1968년 교과서에 수록된 국민교육헌장 (출처 : 경향DB)


통일준비위원회의 민간위원인 제성호 교수는 헌장 주체를 통일준비위원장으로 하는 제1안과 국가원수로 하는 제2안을 제시했다. 어떤 방안이 채택되든 주체는 박근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통일헌장의 주체가 박근혜 대통령으로 명시되면, 해방 이후 대통령이 제정·반포한 헌장은 국민교육헌장에 이어 두 번째가 된다. 통일준비위는 연말까지 헌장 제정을 완료한 뒤 내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통일헌법 제정에 착수할 것이라고 한다.

헌장은 어떤 사업이나 정책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규범이다. 당연히 헌장 제정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어린이헌장이나 자연보호헌장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교육헌장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정권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된 국민 훈육지침이었다. 유신 체제의 사전 정지 작업이라고 비판받았던 국민교육헌장이 민주화와 함께 사문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의 한국은 정치적으로 민주화됐고 사회적으로는 다원화됐다. 헌장과 같은 규범을 내세우며 국민을 한 방향으로 계도할 때가 아니다. 더구나 통일헌장이 체제가 다른 북한까지 아우르고, 향후 통일 헌법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면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은 좋든 싫든 통일을 함께 논의하고 준비해야 할 중요한 동반자이다. 그러나 통일준비위원회가 통일 헌장을 제정하면서 북한과 논의할 것이라는 얘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의 정책이 흡수통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일방적인 통일헌장 제정 움직임을 보면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통일헌법의 제정 움직임은 1982년 전두환 정권 때도 있었다. 북한이 외면하면서 무산되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북한에 남북 합의에 의한 통일 헌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박근혜 정권의 일방적인 통일헌장·통일헌법 제정 움직임은 30여년 전 군사독재 시절보다도 후진적이다.

지난 25년간 역대 정권은 여러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채택했다. 노태우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89·9·11)과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2000), 노무현 정부의 ‘9·19 공동성명’(2005)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2007·10·4)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남북이 합의한 통일 방안은 조금만 손질해 헌장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제기하고 통일준비위가 구성되면서 통일준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미흡하고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보수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로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있다. 지난 30일 예정됐던 남북고위급 2차회담은 무기 연기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5·24조치 해제나 금강산관광 재개처럼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될 조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통일의 해법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북한과 협상하며 남북 교류·협력을 성사시켰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정부의 통일정책 논의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 통일준비위원 50명 가운데 지난 정권의 통일 정책에 참여했던 인사는 극소수이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를 연상케 한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는 ‘통일대박’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상상의 집’을 짓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지금은 통일헌장·통일헌법의 제정을 서두를 때가 아니다. 통일은 속도전이 아니다. 통일준비위원회는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통일의 요체는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다.”


조운찬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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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