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명도 채우기 힘들 것입니다. 돈 내고 들으러 올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지난 8월 말 후마니타스연구소에서 ‘통일 강좌’를 준비하고 있을 때 회사 후배가 한 말이다. “아냐. 그래도 30명은 될 거야.” 이렇게 대꾸하면서도 속으로는 ‘움찔’했다. 대학, 지방자치단체, 도서관에서 앞다퉈 열고 있는 게 인문학 강좌가 아닌가.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이런 ‘인문학 홍수’ 속에서 통일 강좌를 유료로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바르게 살기’ 교육을 돈 받고 하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큰일이겠다’ 싶었다. 수입이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 돈벌이를 위해 기획한 강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통일 강좌가 국민의 통일 염원을 시험하는 리트머스종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좌에서 통일의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자그마한 실천으로 연결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시작 단계에서 우려했던 것은 역시 수강생 문제였다. 열 분의 강사 가운데 전직 장관급 이상의 원로분들이 넷이나 됐다. 모두들 일정을 제쳐놓고 ‘통일’을 말하겠다며 강의 요청에 흔쾌히 승낙했다. 만일 강의실이 썰렁하다면 이분들 뵐 면목이 없다. 연구소 차원에서 이에 대비해 몇 단계의 시나리오는 마련했다. 편집국의 기자들을 참여시키고, 그것도 어려우면 개인 인맥을 가동시켜 수강생을 동원한다는 계획이었다.

다행이었다. 동원이 불필요할 정도로 강좌 첫날부터 강의실은 북적였다. 수강생은 예상을 넘어 50여명에 달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세 명 중 두 명이 50대 이상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경기 용인, 수원, 김포는 물론 멀리 충남 아산에서 온 분도 있었다. 한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지자체 단위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어 수강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강좌의 열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첫 강연을 맡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햇볕정책과 북한 체제의 실상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북한 붕괴와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잇따라 장관을 역임한 정 전 장관이 구수한 입담으로 통일정책을 이야기하자 질문이 쇄도하면서 강의는 예정시간보다 1시간 가까이 넘겨 끝났다. ‘햇볕정책의 입안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꼿꼿이 선 채 쉼 없이 2시간을 내리 강연하는 노익장을 보였다. 그는 1988년 이후 남한의 대북정책을 논리적이면서도 치밀하게 정리해 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에게서는 30년 이상 대북정책을 담당해온 ‘통일 전사’의 힘과 권위가 느껴졌다. 강사진 가운데 최고령인 강만길 교수의 강연은 ‘사제 동행의 대화’처럼 훈훈하고 정겨웠다. 그는 “통일문제를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뜻밖이었다. 한국의 현대를 ‘분단시대’로 명명하고 분단 극복을 위해 한평생 살아온 노학자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말을 되뇌다 “북을 적으로 보기보다는 동반자로 대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그의 뒤이은 말을 듣고서 끄덕였다. 북을 적으로 보는 한 통일이 된다 해도 민족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단체 회원들이 21일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주차장에서 대북전단을 묶은 풍선을 띄우고 있다. (출처 : 경향DB)


통일 강좌 진행자로서 강의 못지않게 수강생들로부터도 배운다. “나는 지금까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강좌를 듣고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북한의 실정을 정확히 알고, 과감히 햇볕정책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좌를 들으러 수원에서 서둘러 오곤 한다는 50대 주부의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사는 60대는 “우리 세대에서 통일을 위해 연결고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 통일은 그야말로 백일몽으로 끝날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든다”고 말했다.

한 수강생은 지난달 말 박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직후 이렇게 물었다. “강사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면 대북정책이나 통일론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은 왜 이리 엇박자로 나가죠?” 이번 강좌의 주제는 ‘통일대박론, 무엇이 문제인가’이다. 연초에 내놓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적으로 살피자는 취지였지만, 통일을 숙고하는 자리가 됐다. 통일이 대박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대박론’은 국민들 사이에 통일을 얘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후마니타스연구소의 통일 강좌가 그 한 사례이다. 강좌의 흥행을 도와준 박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


조운찬 |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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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