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논문 한 편이 한국사 연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1949년 서울대 사학과의 천관우는 ‘반계 유형원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반계수록>을 분석해 유형원의 사회정책론을 개괄한 이 논문은 독창적인 해석과 치밀한 고증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국사학자 이병도가 “군계일학”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논문은 ‘역사학보’ 2호와 3호(1952~1953년)에 실려 뒷날 실학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우성, 김태영, 김준석 등이 연구에 가세하면서 유형원은 ‘실학의 비조(鼻祖)’로 자리매김됐다. 유형원에 관한 한 미국인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도 빠뜨려서는 안된다. 그는 한국인 연구자를 뛰어넘는 업적을 남겼다. 팔레는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라는 두툼한 저서에서 <반계수록>을 해부하며 조선 후기의 사회제도와 유교적 개혁론의 실체를 추적했다.

지난 주말 다산연구소의 실학기행단의 일원으로 전북 부안의 반계서당을 찾았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은 닭이봉이라는 산의 중턱에 있었다. 초입에 세워진 ‘實事求是(실사구시)’라는 커다란 돌비석을 지나 올라가는 길은 시멘트로 깔끔히 포장됐다. 길 중간중간에 반계 유형원과 실학사상을 설명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기와로 복원된 반계서당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른 들판과 바닷가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반계서당의 마루에도 앉아보고 건물 주위를 거닐어본다. 무언가 허전하다. 반계서당의 방마다 채워진 열쇠는 반계 선생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을 막아버리는 듯하다. 서당 앞에 세운 ‘반계정’이라는 정자를 바라보노라니 고개가 갸웃해진다. 유적을 복원하고 정비할 때에는 문헌의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반계정은 정체불명의 누각이다. 서당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반계 유형원 선생 묘터’가 나온다. 반계가 경기 용인의 선산으로 이장되기에 앞서 임시로 시신을 모신 곳이다. 그런데 봉분이 덩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묘터’라 하면 묘가 있던 빈자리라는 뜻일 텐데, 봉분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유적지 곳곳에 설치된 표지판은 친절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익히 보던 내용을 옮겨놓았다. 현장의 이야기가 없는 반계 유적지에서 영화세트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런 상황은 다음날 찾은 흑산도 정약전 유적지도 마찬가지였다.)

반계 유형원 유적지를 정비한 지자체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답사객이 힘들이지 않고 산중의 반계서당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유적 보존에 힘을 쏟아온 전북도와 부안군의 덕분이다. 문제는 역사 유적에서 선인들의 혼과 숨결을 찾아내려는 노력인데, 그것은 행정기관과 학계가 같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 전경. 실학의 대저 '반계수록'은 이곳에서 쓰여졌다. (출처 : 경향DB)


천관우 이후 학계가 유형원을 연구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연구 주제는 실학이 전부였다. 그래서 유형원 하면 <반계수록>을 떠올리고 ‘국가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의 비조’ 운운한다. 서울 출신 유형원이 어떻게 천리나 떨어져 있는 부안의 산촌으로 내려갔는지, 그곳에서 보낸 20년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천관우, 팔레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유형원을 연구할 때 오직 <반계수록>에 의존해왔다. 그때는 반계의 다른 문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20여년 전부터 <반계잡록> <반계일고>와 같은 시문집이 잇따라 발굴, 소개된 이후에도 유형원 연구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반계 유적지가 영화세트장같이 느껴진 것은 이러한 학계의 편향적 연구 풍토 때문일 수도 있다.

반계서당의 뜰 안에는 우물이 있다. 반계 선생이 판 것으로 전해지는 이 우물은 지금까지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선생은 이 물로 차를 달여 마셨으리라. 우리가 찾은 그날도 어김없이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행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이 우물이 현재까지 확인된 반계 선생 당대의 유일한 흔적이다”라고 말했다. <반계일고>에 보이는 ‘지경이 고요해 샘은 늘 살아 있고, 하늘이 맑아 달이 또 떠오른다’(境靜泉常活 天淸月又來, 임형택 번역)라는 구절은 이 우물을 읊은 시인 듯하다. 그러나 우물은 방치된 상태였다. 유서 있는 우물이 복원되거나 정비되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웠다. 다행히 부안군이 다시 반계 유적지 보존사업을 벌인다고 한다. 이를 위해 학술대회가 12월 전주에서 열린다. 반계 선생의 우물을 정비하는 문제도 논의될 것이다. 몇 년 뒤 우리도 그 우물물로 끓인 차를 마실지 모른다.


조운찬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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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