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로부터, 친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장시간 죽음을 화제에 올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죽음이 화두가 되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들만이 아니다. 나에게도 죽음은 한동안, 아니 최근까지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화두였다.

슬프고 가슴이 아린, 초들고 싶지 않은 잿빛 단어인 ‘죽음’이 회자되는 것은 분명 세월호 때문이다. 희생자의 시신이 수습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나 청계광장 조형물에 수북하게 매단 노란 추모리본을 들춰 읽어갈 때, 출퇴근길 스마트폰으로 임형주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들을 때면 추상명사인 ‘죽음’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온다.

흔히 삶과 죽음은 운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같은 시간·장소에서 250명의 꽃다운 젊음들이 스러진 것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감수하라는 것은 참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태어나, 다시 금융위기의 그늘에서 기조차 펴지 못한 아이들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니. 이러한 운명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들의 죽음은 천명도, 신의 장난도 아니다. 우리가 키운 괴물들이 빚어낸 참극일 뿐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더 이상 수입 이론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정확히 꿰뚫는 사회과학 용어가 됐다. 세월호, 마우나리조트와 같은 재난만이 아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핵발전소의 경고, 생태환경의 위기는 또 다른 위험사회의 전조들이다. 위험은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고, 재난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글로벌 위험사회다. 불가에서는 인간이 겪어야 할 고통으로 생로병사를 꼽지만, 이제는 여러 과정이 생략된 채 죽음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세계는 생사(生死), 유명(幽明), 시종(始終), 인귀(人鬼)와 같은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울광장에서 시민이 세월호 사고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인간 리본 만들기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출처:경향DB)


<논어>에는 죽음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공자가 “삶을 모른다면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공자의 이분법적 생사관을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공자의 발언을 두고 대표적인 <논어> 주석가인 성리학자 주희는 공자가 죽음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라 죽음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했다. 또 주희의 선배인 정이천은 “생과 사는 하나이면서 둘이다”라고 해석하며 생사의 모순과 대립을 뛰어넘으려 했다. 공자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런데 이곳의 삶보다 이후의 죽음을 더 자주 얘기했다. (<논어>에는 ‘죽을 사(死)’ 자가 38회, ‘날 생(生)’ 자는 16회 나온다.) 왜일까. 공자의 죽음에 대한 언명은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다.

이처럼 옛날에는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노장철학은 더 나아간다. 장자는 “삶을 죽이는 사람에게 죽음은 없고,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삶은 없다”(<장자> ‘대종사’)고 천명했다. 형용모순처럼 보이지만, 생사를 나누지 않아야 삶과 죽음을 또렷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현충일에는 서울 봉원사의 영산재를 보러 갔다가 불교의 생사관 역시 공자나 장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배웠다. 알려져 있듯이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고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이다. 한데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영산재는 망자의 왕생극락을 비는 천도재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영산재를 지켜보면서 축제로 시작한 영산재가 위령제로 변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현장에서 만난 동방대학원대학교의 심상현 교수가 ‘회향(廻向: 공덕을 남에게 되돌림)’이라는 단어로 명쾌하게 해답을 주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 설법에서 받은 산 자의 공덕과 선업을 죽은 이에게 회향하면서 천도재로 바뀌어 갔다는 것이다. 불교의 회향 정신이 있었기에 영산재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어우러지고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불교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삶과 죽음을 둘로 여기면 삶도 힘들고 죽음도 편안하지 않다. 그 둘을 하나로 받아들일 때 산 자와 죽은 이가 함께할 수 있다. 송나라 학자 장재는 이러한 경지를 “살아서는 내가 하늘을 순히 섬기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서명(西銘))고 요약했다. 이문재 시인도 최근 펴낸 시집 <지금 여기가 맨앞>에서 죽음에 대한 통찰을 보여줬는데,삶이 죽음과/ 함께 살지 못해서/ 죽음이 죽음으로 살지 못했다/ 죽음이 죽지 못하고 죽어서/ 삶이 삶으로 살지 못했다’(시 ‘백서’의 부분)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


조운찬 경향후마니타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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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