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유배형을 산 다산 정약용의 삶도 기구했지만, 가족의 불행도 그에 못지않았다. 천주교를 신봉했던 셋째 형 약종은 사형에 처해졌다. 함께 귀양길에 나섰던 둘째 형 약전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산은 여섯 자식을 천연두, 홍역 등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다산은 생전에 6남3녀의 아홉 자식을 보았다. 이 가운데 4남2녀가 비명에 갔다. 장성한 자식은 학연·학유 형제와 딸, 세 명에 그쳤다.

다산이 처음으로 참척의 소식을 접한 것은 1790년 4월 경상도 진주에서였다. 당시 다산은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세 살 된 아들 ‘구장’이 천연두로 세상을 떴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크게 애통해했다. 더욱이 아이가 세상을 뜬 그 시각에 자신은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통곡했다. “지금 날짜를 따져보니 구장이 신음하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는 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며 촉석루 아래 남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구장의 묘지명’) 다산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추도문과 조시를 남겼다.

두 번째 역시 천연두로 죽었는데, ‘효순’이란 이름의 세 살 난 딸아이였다. 다산은 추도문에서 딸의 짧은 삶을 기록하며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가 다투면 옆에서 웃음지으며 화를 풀어주고, 식사 때를 놓치면 애교어린 말로 식사를 권했던” 착한 아이라고 회고했다.

죽은 자식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농아’의 추도문이다. 1802년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의 죽음을 접했다. 한 해 전 같이 살 때만 해도 ‘아버지, 아버지’ 하고 따랐던 네 살짜리 아들이었다. 유배지에서도 아들이 그리워 바닷가의 소라껍데기들을 구해 아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자신을 생각하면 죽어야 할 사람이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추도문에는 참척을 당한 아비의 비통함과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어난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구나.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인가. … 네 모습은 깎아놓은 듯이 빼어난데, 코 왼쪽에 작은 사마귀가 있고, 웃을 적에는 양쪽 송곳니가 뾰족하게 드러난다. 아아, 나는 오로지 네 모습만이 생각나서 거짓 없이 너에게 고하노라….”

다산 정약용


다산은 또 1797년 세 살배기 ‘삼동’을 병으로 보냈고, 1781년과 1799년에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이들을 병으로 여의었다. 그때마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형식은 부고, 묘지명, 조시 등으로 달랐지만 자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한결같았다.

다산은 먼저 간 자식들을 광주군 마현의 생가 뒤에 있는 두척리 선산(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에 묻었다. 지금 그곳에는 다산의 장남 학연을 비롯해 학연의 아들 대림, 대림의 손자이자 <사암 연보>의 저자인 규영 등 후손들의 묘가 남아 있다. 그러나 농아, 효순, 구장과 같은 요절한 자식들의 무덤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비석과 같은 표지를 남기지 않아서이다.

아들을 먼저 보낸 날, 선배 문인 이기양이 다산에게 말했다. “아이들의 생년월일, 이름, 모습뿐 아니라 죽은 연월일을 써두고 뒷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자취를 알게 해야 한다.” 다산은 이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그렇다고 추도문을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이 수시로 강토를 휩쓸었다. 아이들이 수없이 죽어가는데도 조정과 권세가들은 수수방관했다. 다산은 분개했고, 스스로 자식들을 살릴 방법을 찾아나섰다. 의학서적 <마과회통> <종두설>은 이렇게 쓰여졌다. 다산이 의서를 짓고, 아픈 백성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던 것은 자식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회한 때문이리라.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이 흘렀다. 그간 해결된 일도, 매듭 지어진 일도 하나도 없다. 유족들의 절망과 분노는 사그라질 줄 모른다.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정신을 추스려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누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세월호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 슬픔을 억누르십시오. 그리고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기록하십시오. 떠난 아이의 삶을 하나하나 적으십시오. 힘드시겠지만 세월호 참사 및 수습 과정에서 목격했던 경찰과 정부의 행태도 빠짐없이 증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과 같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역사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자 수많은 기록들의 침전물입니다.


조운찬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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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