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3월26일 순국할 때까지 5개월간을 만주 뤼순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 의사는 죽음에 앞서 옥중에서 적잖은 유묵(遺墨)들을 남겼다. 안 의사의 유묵은 200여점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들 글씨가 사형선고(1910·2·14)를 받은 이후 한달여 동안 집중적으로 쓰여졌으며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안중근은 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글씨를 써 적국의 사람들에게 주었을까. 1970년대 중반 경향신문의 보도는 그 실마리를 찾게 해준다.

1976년 2월10일 경향신문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 1점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문제의 유묵은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운다). 단아한 해서체 서예작품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贈安岡檢察官’이라고, 왼쪽 아래에는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謹拜’라고 쓰여 있다.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삼가 드린다’라는 내용이다. 낙관은 없고 대신 먹물로 찍은 안 의사의 수인(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다.


당시 기사는 유묵을 갖고 귀국한 최서면 당시 도쿄한국연구원(국제한국연구원 전신) 원장의 말을 빌려 작품의 소장 내력과 환국의 경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르빈에서의 의거(1909년 10월26일) 후 旅順감옥에 투옥된 安의사는 취조 담당관인 야스오카 검사가 방한용 양말 한 켤레를 선물한 데 감사, 야스오카 검사가 차입해준 비단폭에 써준 글로 야스오카씨는 이를 가보로 외동딸인 우에노 도시코(上野俊子) 여사(70·東京都·당시 7세)에게 전해주었는데 60여년 동안 이를 간직해온 우에노 여사가 崔 원장에게 찾아와 애국지사의 유묵을 본국에 전해줄 것을 당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취조한 야스오카 검찰관에게 써준 것을 장녀가 물려받아 한국에 돌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어 현재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안 의사의 옥중 휘호 200여점 가운데 실물이 확인된 것은 50여점. 이 가운데 26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야스오카에게 주었던 작품처럼 나머지 안 의사의 유묵이 어떻게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걸 밝혀내는 것은 안중근기념관을 비롯한 소장자, 그리고 연구자들의 몫이다.

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