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村集> 6

 

明谷書院追享風玉滄江兩先生通文風玉軒趙先生名守倫滄江先生名涑風玉之子a_180_106a

右文爲追享風玉軒先生及滄江先生於明谷書院事也風玉軒先生居弊邑之文照鄕五六秊而滄江先生實以降於此其所謂風玉軒遺址尙在其兩世遺範故老猶能道其詳其與一時杖屨之地不可同日而語也

오른쪽 글은 풍옥헌선생과 창강선생을 명곡서원에 추향하는 일을 위함이다. 풍옥헌선생은 우리읍의 문조향에 5,6년 계셨으며 창강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나셨으니 이른바 풍옥헌의 유지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겠다. 두분이 남기신 유범은 고로(늙은이)들이 아직 상세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니 잠시 자취를 남긴 지역과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

 

趙守倫(1555(명종 10)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만귀(晩歸).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문관전한 종경(宗敬)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강욱(姜昱)의 딸이다. 처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현감 선복(善復)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79(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4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90년에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곧 해직되고, 160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복직되었다.1604년 대흥현감에 제수되었다가 1607년에 파직되었고, 1609(광해군 1)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1611년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1612년 신율(申慄)이 황혁(黃赫)과의 오랜 원한으로 역옥(逆獄)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었다.성혼의 문하에서 단아한 행실로 인해 명성을 얻었으며, 경학에도 조예가 있어 그가 집무하는 관아에서 여러 동문들과 함께 우계집(牛溪集)을 편집, 출간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趙涑1595(선조 28)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병조 참판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이고, 이조 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 : 나라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 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저서로 창강일기 滄江日記가 있으며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 삼절(詩書畫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산수와 더불어 수묵 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히 까치나 수금(水禽) 등을 소재로 한 수묵 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明代)의 화조화가(花鳥畫家)인 임량(林良)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 특유의 정취 짙은 서정 세계와 상통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지운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이하영(李夏英)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공필풍(工筆風)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와 같이 주목되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특히 미법(米法)을 기조로 하여 다루어진 호촌연의도는 조선시대 남종화(南宗畫) 발전의 초기 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그는 그림뿐 아니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을 보여 그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의 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 방면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 梅鵲圖등이 있다.

 

*文照鄕 :충청도 서천에 있던 특수행정구역인 향의 이름.

* 杖屨 [ 장구 ] 지팡이와 신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

 

弊邑早合有俎豆之享而迄今未也雖緣事有所未遑而其爲弊邑文獻之羞可勝言哉今者 章甫齊聲將以兩先生同享於明谷書院而事係斯文有不可私於一鄕故敢以通告於列邑儒林

 

우리 고을에서는 일찍이 두 분에 대한 제사를 올렸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그리 하지 못했다. 비록 일이 서둘러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고을의 문헌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움이 됨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유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두 선생을 명곡서원에 배향하자고 하는데, 일이 사문(유학)에 관계되어 한 고을에서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열읍의 유림들에게 감히 통지해 고한다.

 

*不可胜言 : 旧读shēng):说不尽形容非常多或到达极点

<出处>西汉·司马迁史记·大宛列传》:骞曰为汉使月氏而为匈奴所闭道今亡唯王使人导送我诚得至反汉汉之赂遗王财物不可胜言’”

西汉·司马迁史记·游侠列传》:所藏活豪士以百数其余庸人不可胜言

*缘事 1. 犹公务唐 韩愈 赠张籍昨因有缘事上马插手版

2. 因事借端。《三国志·魏志·公孙度传悉斩送 弥 晏 等首裴松之 注引 三国 魏 鱼豢 魏略》:而后爱憎之人缘事加诬伪生节目卒令明听疑於市虎

3. 佛教语谓与己有关之世间俗事宋 何薳 春渚纪闻·点铜成庚》:若首座有未了缘事可与众集福者我当分药点治虽百两不靳也

 

惟我風玉軒先生早遊牛溪先生之門其律身之嚴操守之約眞得其傳授法門則其淵源所自的有端緖矣及其訓學於家而英才爭附其不倦之誨典敎於庠而門徒各盈其飮河之腹則其薰炙之及於人者亦已廣矣不幸遭時昏亂酷被淫刑而仁廟反正贈職賜祭曰予敢私爾天實報仁云云則其崇報之典至矣

우리 풍옥헌선생은 일찍이 우계선생의 문하에 노닐어 몸을 엄히 다스리고 지킴에 요약이 있어 선생이 전수하는 법문의 진수를 얻었으니 학문의 연원과 유래가 확실한 단서가 있었다. 집안의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서는 영재들이 다투어 따랐다.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고 서당에서 교육을 담당할 때에는 문도들이 모두 만족하였으니 그의 교화와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게 매우 넓었다. 불행하게도 어둡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중형을 당했다. 그러나 인조가 정치를 바르르게 한 뒤에는 증직과 제사를 내리며 말하기를, “내 너를 감히 사사롭게 여기니 하늘이 실로 인으로 보답할 것이다운운하였으니 그 은덕을 갚은 법도가 지극하였다.

 

*: [形容词]确实实在:~‖~(—dàng恰当)‖~确凿的证据

*所自[suǒ zì] 由来来源

宋 曾巩 蒲宗孟祖伸赠太子少傅制》:流泽也远有孙而贤进於中台摠国纲辖善有所自朕惟汝嘉明 文徵明 叙陈氏家乘》:不知姓之所自而昧昭穆之叙·田兰芳叙袁仲方袁可立孙甲子秋冬诗》:望著义于卷首使子弟知进学所自以无忘今日之雅非敢要谀也清 姚衡 寒秀草堂笔记卷三快雪堂肥瘦两刻皆佳而瘦本神理绝似 伯衡相公 虽为至戚询其后人莫知所自

*典敎 : 지켜야 할 가르침

*饮河满腹 yǐn hé mǎn fù

解释】:比喻人应知足贪多无益

出处】:战国··庄周庄子·逍遥游》:鹪鹩巢于深林不过一枝偃鼠饮河不过满腹

事例】:巢林一枝鸟见遗于丛苇;~,兽不吝于洪波。 ★·张君房云笈七签49

用法】:作宾语用于劝诫人

*淫刑 (1).滥用刑罚。《左传·僖公二十三年》:淫刑以逞谁则无罪后汉书·史弼传》:若承望上司诬陷良善淫刑滥罚以逞非理则 平原 之人户可为党唐 陈子昂 谏政理书》:明讼恤狱以息天下之淫刑金 王若虚 五经辨惑上》:晋灵 之不君淫刑而厚歛愎谏而贼贤

(2).重刑酷刑汉 扬雄 廷尉箴》:昔在 蚩尤 爰作淫刑宋 袁褧 枫窗小牍卷上身被淫刑祸及朋友清 侯方域 拟思宗改元颁示百官廷臣谢表》:悬鹅鹜之馀食犬吠篱间逞刀锯之淫刑猿愁梯上鲁迅 书信集·致曹聚仁》:别国的硬汉比 中国 多也因为别国的淫刑不及 中国的缘故

*崇報:은혜를 갚음

 

至若滄江先生則其實德至行宏才遠猷得於天賦之純而成於庭訓之懿隱痛先禍無意斯世斂跡守晦若無能焉而至其臨國家患難之際則忠義奮發不能自已其癸亥靖社之日協贊大謀甲子逆适之變自請一隊可知也旣贊大謀而避不與於銘勳棲遑沉淪以自韜晦晩乃自廢以阿睹之疾以終斯乃有志之士所共感慕於無竆者也區區後生不敢妄以一辭有所稱揚

창강선생은 실덕을 극진히 행하고 재주와 도모하는 바가 원대하였으니 순수한 천품을 얻어 선친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성취했다. 그러나 선대의 재앙에 대해서는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지켰으니 마치 무능한 사람과 같았다. 국가의 환란을 당할 때에 이르러서는 충의로 떨쳐일어나 스스로 그만두지 않았다. 계해정사 때에는 국정에 참여해 큰 도움을 줬으며, 갑자년(1624, 인조 2) 이괄의 난에는 군대로 나설 것을 청한 사실은 알려진 일이다. 이미 국정에 참여해 크게 도왔으면서도 공훈 받기를 회피하고, 서둘러 은둔해 수양하였으며 만년에는 자폐하다가 눈병으로 별세했다. 선생은 뜻이 있는 선비로 모두 감모하는 바가 끝이 없는 분이다. 보잘 것 없는 후생이 망령되어 하나의 문장으로 우러러 선양할 수는 없다.

 

庭训[tíng xùn] 孔子和他儿子孔鲤的故事说有一天孔子站在庭院里他的儿子孔鲤趋而过庭什么叫就是小步快走是表示恭敬的动作在上级面前在长辈面前你走路要低着头很快很快地这样走过去这叫那么孔鲤看见父亲孔子站在庭院里面于是低着头孔子说站住学诗了吗”“没有不学诗何以言你不学诗你怎么会说话)?”“退而学诗又一天孔子又站在庭院里孔鲤又趋而过庭孔子说站住学礼了吗”“还没有不学礼何以立不学礼你怎么做人”“退而学礼

癸亥靖社 : 일찍이 광해군이 소성 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의 위호를 없애고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불렀다. 깊이 감금하여 곤욕을 주었는데 계해년에 이르러 서인(西人)들이 구호하여 대비의 위를 회복하였으니 서궁의 참()이 징험된 것이다. 속잡기(續雜記)

*栖遑 : 忙碌不安奔忙不定晋 陆机 演连珠》:是以利尽万物不能叡童昏之心德表生民不能救栖遑之辱北周 庾信 和裴仪同秋日栖遑终不定方欲涕沾袍唐 王绩 游仙诗之四为向天仙道栖遑君讵知宋 司马光 送聂之美摄尉韦城徒劳已足倦漂泊益栖遑

*阿睹 : 这个(出处) 元 杨瑀 山居新话》:王衍 以铜钱为阿睹物顾长康 画神指眼为阿睹中二说於理未通今北方人凡指此物皆曰阿的即阿睹之说明矣阿睹(=阿堵): () 물건; ; 눈동자 아도물 (阿堵物)

 

而惟是美村先生祭滄江先生之文曰昔我默菴公講道於溪上也主本實而略浮華先行義而後文藝每有文莫吾猶之歎而敎人則取夫從先進之遺意由是及門之士雖各以才識之高下爲造詣之淺深而若其愼言而敏行輕外而重內反躬守約而不求人知則莫不皆然

 미촌 윤선거 선생이 쓴 창강선생 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예전에 우리 묵암공이 계상에서 도를 말할 때에는 근본과 실질을 주로 하고, 부화함을 빠뜨렸으며 먼저 실천과 의리를 앞세우고 문예를 뒤로 하셔서 그 때마다 문막오유(文莫吾猶)의 탄식이 있었다. 또 사람을 가르칠 때는 선배를 따르겠다는 공자의 뜻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의 문하에 이르는 선비들은 각각 재주와 식견의 고하에 따라 학문의 깊이는 달랐지만 말은 신중하고 행동은 민첩했으며 겉으로는 가벼운 듯하지만 속은 진중하고 몸을 돌아보아 스스로를 단속하고 다른 사람의 알아줌을 구하지 않았으니, 모두들 이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美村 : 윤선거(尹宣擧)의 호. *默菴 : 牛溪 성혼의 호.

*문막오유(文莫吾猶)의 탄식 : 논어술이(述而)문학에 있어서는 내 남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함은 내 얻은 것이 없다.[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則吾未之有得]”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문학이나 문장보다는 궁행 실천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從先進之遺意 : 논어(論語)선진(先進)선배들의 예악에 대한 태도를 두고 사람들은 촌스럽다 하고 후배들의 그것은 군자 같다고들 하는데, 내가 예악을 쓴다면 선배들처럼 행하겠다.[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公之先君子能得其一體不事乎口耳專用心於內不幸遭罹昏椓隕身世禍德善功業不得見於世傳諸後而其忠信篤敬之學端淸剛介之操謹質謙退之行遺風餘韻猶可誦而慕之也

공의 선친은 그 일체를 능히 갖추어 입이나 귀로만 일삼지 않고 안으로 오로지 마음을 썼으나 불행히 환관에게 걸려들어 세화에 몸을 잃게 됐으니 덕선과 공업은 후세에 대대로 전해지지 못했지만, 충신독행의 학문과 단청강개의 지조, 그리고 근질염퇴의 행실은 유풍과 여운으로 남아 아직도 우러러 외우며 생각할 수가 있다.

*先君子 : 돌아가신 아버지; 선고(先考); 망부(亡父)

*昏椓(혼탁) : 내시. 환관(宦官). 은 궁형 탁.

  公以賢父之子所以幼成於家庭者盖不失法門餘矩故平生所得於本源者有以自信而不疑所立於實地者有以自守而不撓所約以成一家之法者不出於䂓矩繩墨之外所奮以見諸事業之著者無憾於人倫天理之極以余觀公卓卓乎其不可及已云云

공은 현부의 아들로 부모 슬하에서 자란 까닭에 법도있는 집안의 절도를 잃지 않았다. 이로써 평생 근본과 원천에서 얻은 것은 스스로 믿음이 있어 의심하지 않았으며 실지에 세운 것은 스스로 지킴이 있어 꺾이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를 단속해 일가의 법의 이룬 것이 규구승묵의 밖으로 벗어난 게 없었으며 분발해 사업이 드러내 보이는 것도 인륜 천리의 법도에 비추어도 유감이 없었다. 내가 공을 보건대 우뚝 솟아 있어 따라갈 수가 없었다. ....”

 

則於兩先生道學之淵源德行之規模可謂形容盡矣而亦可謂百世不易之公論也夫如是則弊邑今日之事烏可以已哉亦豈吾等一二人之所可私者哉玆於卽事之初通告其由伏惟念斯文鄭重之擧而尙有以顧助之則幸甚

그런 즉 양 선생의 도학의 연원과 덕행의 규모는 가히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할수 있으며 또한 백세가 되어도 바꿀 수 없는 공론이라고 이를만 하다. 이와같으니 우리 읍의 금일의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며, 우리 한두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있은 것이겠는가. 이에 일을 진행하는 처음에 그 연유를 알린다. 삼가 우리 유학의 정중한 거사를 생각하여 돌아보며 도와줌이 있었으면 지극히 다행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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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