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이 남긴 자료는 많지 않다.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으로 봐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농민 봉기 때 돌렸다는 ‘사발통문’이나 ‘격문’, ‘포고문’ 등을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작성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전봉준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지영은 1940년 펴낸 <동학사>에서 전봉준이 13세 때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라는 한시를 소개했다. “自在沙鄕得意遊(자재사향득의유)/ 雪翔瘦脚獨淸秋(설상수각독청추)/ 蕭蕭寒雨來時夢(소소한우래시몽)/ 往往漁人去後邱(왕왕어인거후구)// 許多水石非生面(허다수석비생면)/ 閱幾風霜已白頭(열기풍상이백두)/ 飮啄雖煩無過分(음탁수번무과분)/ 江湖魚族莫深愁(강호어족막심수)”

한시는 백구(갈매기)에 빗대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는 한시의 어휘, 비유로 보아 10대 초반의 어린아이가 지은 작품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이와 달리 1974년 5월1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전봉준 유시(遺詩)’는 전봉준이 직접 쓴 한시로 평가받는다. 이해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당시 51세)은 정읍군지에 수록할 자료를 모으다 천안 전씨 족보에서 전봉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시를 발견, 공개했다. 이 시는 족보의 ‘전봉준 장군’ 난의 여백에 ‘운명(殞命) 유시’라는 제목으로 쓰여 있었다. 유시는 혁명에 실패한 뒤 사형을 앞둔 전봉준의 착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 경향신문이 보도한 유시와 소설가 김동리의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 편이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올바른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최현식은 뒷날 이 시를 자신의 저서 <갑오농민혁명사>(1994·신아출판사)에 수록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절명시를 천안 전씨 족보에서 발견했다고 쓰지 않고 “이종학 소장이 수집한 일본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인용했다”고 밝혔다. 시사신보는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 동학 지도자들이 1895년 3월29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교수형을 당했다고 보도한 신문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최현식 선생이 전봉준 절명시를 본 것은 전씨 족보가 먼저였지만, 뒤에 시사신보에서 출처를 확인해 이 신문을 전거로 인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운찬 문화에디터 sidol@kyunghyang.com

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