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흔여섯인 정해렴 선생은 매일 도시락을 들고 경기 고양의 자택에서 서울 공덕동의 오피스텔로 출근한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고전을 번역하거나 출판을 앞둔 원고를 교열한다. 지난주 선생의 오피스텔을 방문했을 때 그는 <동주열국지>를 번역 중이었다. 책상에는 <열국지>의 한문본과 중국어본, 그리고 육필 번역 원고가 놓여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작업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각종 사전들이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그가 한문 번역을 할 때는 <대한한사전>(교학사)을 주로 참고한다.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중문대사전>(중화서국·전10권)을 들춰본다. 대만 정부가 모로하시 데쓰지의 일어판 <대한화사전>(전13권)에 자극을 받아 발간했다는 초대형 한문 사전이다.


책상에 펼쳐져 있는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은 4500여쪽의 쪽마다 손때가 절어 있다. 의자 뒤편으로는 한글학회 발간 <우리말큰사전>(전3권)이 있고 북한에서 나온 <현대조선말사전>(전2권)도 보인다. <고어사전>이나 <국어국문학사전>은 고전 번역·교열 작업을 하는 정 선생에게는 요긴한 공구서이다. 큰 서점에서도 보기 힘든 <동의학사전> <한국인명대사전> <중국이십육사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도 눈에 띈다.


올해로 출판계 입문 50년째인 정 선생은 교열 전문가이다. 그의 인생은 ‘사전과 함께해온 삶’ 그 자체다. 한때 창작과비평사 대표를 맡았고 지금도 현대실학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는 출판인보다는 한용운전집과 채만식전집을 낸 교열자로서의 자부심이 더 크다.


40년 출판 외길을 걷고 있는 정해렴 대표(출처: 경향DB)


요즘 정 선생처럼 사전을 보는 이는 극히 드물다. 10여년 전만 해도 내가 재직하는 신문사 편집국에는 국어·영어 사전, 옥편 등이 지천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컴퓨터나 전자사전에 모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 사전을 즐겨 이용한다고 한다. 이러다가 종이 사전은 도서관 서가나 책박물관의 수장고에서나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전의 퇴출을 ‘시대의 대세’라는 이름으로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사전은 단순한 어휘모음집이 아니라 ‘과학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특정 철학체계 속에서 정리한 것’(황젠화, <사전론>)이기 때문이다. 사전은 사회 지식의 결집체이다. 또 사회를 이끌어가는 역할도 한다. 서양에서 디드로의 <백과전서>가 18세기 유럽을 계몽시키고 프랑스혁명의 싹을 틔운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앞서 편찬된 <강희자전>은 중국 문화를 정리하는 기반을 마련하며 강희·옹정·건륭의 성세를 이끌었다. 2005년 이후 남북이 추진하고 있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은 남북의 언어 이질화 해소뿐 아니라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사전’의 성격이 크다.


사전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고 사전 편찬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사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주 개봉한 <행복한 사전>은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일본소설 <배를 엮다>를 각색한 영화는 ‘대도해(大渡海)’라는 국어사전을 만드느라 인생의 전부를 쏟아넣은 사람들의 열정, 사랑, 고민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대도해’란 ‘사전을 배 삼아 세상을 건너겠다’는 뜻이다. 영화에는 ‘오른쪽’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논란을 벌이는 대목이 나온다.


“ ‘오른쪽’을 ‘왼쪽의 반대’라고 정의해선 안된다. 순환논법에 빠지기 때문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손의 쪽’도 곤란한다. 왼손잡이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다. ‘심장이 없는 쪽’도 틀린다. 우측에 심장이 있는 사례도 있다.” 결국 영화 속 사전 편찬자들은 ‘오른쪽’의 의미를 ‘10’에서 ‘0’이 있는 쪽으로 하자는 데 합의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를 정의하기까지에는 오랜 고민과 숙의를 거친다. 


중국의 언어학자 황젠화는 사전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황젠화 역시 읽는 것보다 검색이 더 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사전의 중요성이 결코 감소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보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등 서구에서는 사전류 출판의 비중이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종이 사전의 판매와 이용률이 급락하고 있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사전은 ‘소리 없이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이다. 예전 졸업식에서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사전을 주었던 것은 사전을 무기로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이번주 봄방학이 끝나면 3월이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젊은이들에게 사전을 펼치라고 권하고 싶다.


조운찬 문화에디터

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