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소설 <수색, 그 물빛 무늬>는 서울 수색동이 모티브가 됐다. 수색(水色·물빛)이라는 지명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았다고 작가로부터 들었다. 내가 ‘미호(渼湖)’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물이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을 가진 그곳에 몇차례 간 적이 있다. 그러나 ‘미호’는 호수가 아니다. 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일대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일컫는 지명이었지만, 이제는 그 이름마저 사라졌다. 다만 그곳에 은거했던 조선조 문인 김원행의 호(號)로만 전할 뿐이다.


석실서원 터에서 바라 본 미호.(출처 : 경향DB)


지난달 12일 한국고전번역원의 문집번역총서로 <미호집>(보고사)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출판기념회에 달려간 것은 ‘미호’ 때문이었다. 출판기념회에서 김원행(1702~1772)과 <미호집>의 대략을 귀동냥으로 알게 됐다. 그러면서 5권이나 되는 <미호집>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이 편지글인 데다 한시, 묘지명, 제문 등 딱딱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는 문집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해찰을 해가며 듬성듬성 관심가는 대목만 뽑아서 보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책을 놓았다.


김원행은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가계를 알면 이해가 쉽다. 그는 병자호란 때 화친에 반대해 청으로 끌려갔던 김상헌의 5대손이고, 나란히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김창집 부자의 증손자 및 손자이다. 조선 명문가인 안동김씨 가문의 적통으로 보면 된다. 그런 그가 17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니 탈이 없었다면 고관대작은 따논 당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0세 때 잇따른 정치적 사건(신축환국·임인옥사)으로 할아버지(김창집), 친아버지(김제겸), 친형(김성행) 등 삼대가 일거에 죽음을 당하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맞는다. 멸문의 화를 겪은 그는 과거나 출세 따위의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의 젊은 날은 유람과 독서로 채워졌다. 40이 넘어 정착을 했는데, 그곳이 바로 미호였다. 김상헌을 모신 석실서원과 선대의 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당쟁의 여파로 관리가 되지 못한 석실서원의 중흥에 뜻을 세우고, 선비 교육에 나선다.


김원행은 흔히 한양, 경기 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조선 후기 사상논쟁인 호락논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힘을 기울인 것은 서원 교육이었다. <미호집>에는 ‘석실서원 학규(學規)’ ‘석실서원 강규(講規)’와 같은 서원의 규칙과 예절을 규정한 기록이 여러 편 보인다. 주목할 대목은 김원행이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양반과 상민, 한양과 지방의 구분이 뚜렷했던 18세기 조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경상도 함안에서 온 주필남이라는 유생이 서원에서 공부한 지 반 년 만에 병으로 숨진 일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해 시골집으로 운구할 비용마저 마련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때 김원행은 선비가 죽었는데 장사도 치르지 못하면 유가의 도리가 아니라며 영의정에게 편지를 띄워 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또 주필남이 읽었던 <소학>의 뒷장에 글을 써 고인을 추모하기도 한다.


김원행의 헌신적인 애정과 노력으로 석실서원은 스승과 제자가 어우러지는 학술공동체로 거듭났다. 이들은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시대를 논했다. 때론 대자연 속에서 시를 읊으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미호집>에는 미호 강변에서 김원행이 제자들과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가 적지 않다. 당시 그곳에는 전국 팔도의 문인 수십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훗날 실학자로 이름을 떨친 홍대용, 황윤석도 그 일원이었다.


김원행은 미호의 석실서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생전에 김원행의 높은 학식과 절의가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사직 상소를 올리며 거절했다. 이를 두고 아들 김이안은 “아버지는 과거를 가볍게 여기셨다(知科擧之輕)”면서 “다시는 한양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았다(不復踐京城一步)”고 기록했다. 나는 김이안이 쓴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미호에서 한양까지는 채 20㎞도 되지 않는다. 걸어도 한나절이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폐족이라 여기고 은거하겠다는 첫 맹세를 지키며 서울땅을 밟지 않았다. 그 다짐과 절개가 조선의 어느 정치인이나 학자가 남긴 자취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오늘날 석실서원은 흔적도 없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파괴된 지 150여년이 지나면서 폐허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석실서원지’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다행히 겸재 정선이 그린 ‘미호’ 그림이 <경교명승첩>에 실려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석실서원터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미호’라는 이름만큼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미호의 아름다움이 어찌 풍광에만 있겠는가. 그곳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사상을 논했던 서원지기 김원행과 그 제자들의 학예활동이 그 아름다움에 값할 것이다.


조운찬 문화에디터

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