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중랑구이다. 이곳에서만 근 20년을 살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온전한 중랑구 주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평일은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공휴일에는 집 안에서 보내는 날이 많다. 친구로서 만나는 지역 주민도 없다. 평소 내가 느끼는 중랑구의 생활공간은 출퇴근 시 지나다니는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의 반경 1㎞ 정도가 전부이다.


내가 이 지역에 정을 붙이지 못했던 이유는 또 있다.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올 한 해 언론에 보도된 지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43만명이 사는 중랑구는 서울 지역에서 연평균 사망률이 가장 높다. 중랑구에서는 10만명당 한 해 평균 469명이 사망해 가장 낮은 서초구(335명)보다 43%나 높다. 서울에서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이 가장 많은 곳도, 아동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곳도 중랑구이다. 


 

서울 중랑구 주민과 우림시장 상인으로 구성된 뮤지컬 극단원들이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중랑구민들의 열악한 삶은 교육이나 문화 생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최근 조사된 초·중·고교의 폭력실태를 보면 중랑구 학생들의 학교폭력 피해율은 서울의 25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두 번째로 높았다. 중랑구는 또 서점 수가 가장 적을 뿐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한 책 구입 비율이 서울 자치구 중에서 가장 낮다는 통계도 있다. 멀티플렉스와 같은 대형 영화관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주 치러진 18대 대선 당시 중랑구 유권자 가운데 73.15%가 선거에 참여했다. 서울시 25개 구 가운데 22위의 투표율이다. 앞서 16, 17대 대선에서도 중랑구는 각각 70.8%, 62.9%의 투표율로 두 번 모두 서울시에서 가장 낮았다.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정치에 무관심하게 된다는 게 통념이다. 그래서 대개는 선진국의 투표율은 후진국보다 낮고 서울이 지방보다 낮다. 그렇다면 소득과 삶의 질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중랑구의 낮은 투표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주주의가 자유나 평등과 같은 정치이념의 토대 위에서 이뤄지고 있음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치 철학이나 이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주의 정치 참여와 실천 의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이 점에서 미국의 철학자 폴 우드러프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분석한 <최초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민주주의 가치로 자유, 조화, 법치, 평등 이외에 시민 지혜, 인간의 추론 능력, 교양 교육을 꼽은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우드러프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혜를 정치에 이용하고 그것을 지도자들에게 전달할 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민의 지혜는 교양 교육에 의해서 계발된다. 고대 그리스가 전문적인 직업 훈련과 다른 파이데이아(일반 교양 교육)를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내에도 파이데이아와 같은 시민교육 기관이 더러 있기는 하다. 서울에서는 수유너머, 대안연구공동체, 길담서원 등을 꼽을 만하고 부산에서는 인디고서원의 활동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들 단체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지역 문제와 유리돼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지난달 중랑구 망우역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에 한 카페가 들어섰다. 주민단체인 ‘중랑마을넷’이 운영하는 그곳은 북카페를 표방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마을 사랑방에 가깝다. 지난 주말 그곳에서는 배화여고 어쿠스틱밴드 ‘스트랩소디’를 초청해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관객이라야 ‘동원된’ 공부방 어린이들을 포함해 20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참가자들은 밴드 화음에 맞춰 ‘강남스타일’을 외치고 ‘징글벨’을 노래했다. 중랑마을넷의 사랑방 지기인 이수종씨는 “영화 상영, 시낭송회, 동화 구연, 공연 등 다양한 문화체험 활동을 기획해 북카페를 주민 문화 체험의 장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시간 반 동안 작은 공연을 지켜보면서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중랑구의 모습을 확인했다. 고대 파이데이아의 시작도 이렇지 않았을까.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아고라나 아크로폴리스 같은 토론의 광장에서 싹이 텄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랑마을넷도 이름처럼 지역주민을 그물처럼 이어주며 시민 교양 교육의 장소로 발전할 수는 없을까.


무지와 무관심이 민주주의의 적이라면, 시민 교육은 민주주의의 희망이다. 교육이 민주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대선이 끝나면서 국민들 사이에 환호와 실망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그러나 환호와 실망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내 ‘정치는 정치인들에게’를 외치며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5년 뒤 환호하거나 실망할 것이다. 정치가 청와대나 여의도에서만 행해져서는 안된다. 한국 정치에 대한 절망과 혐오를 줄이려면 ‘생활 정치’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성범죄, 학교폭력, 재개발 갈등, 동네 상권 살리기와 같은 지역 현안은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때 바른 해법이 찾아진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말하지 않는 자에게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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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