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404쪽 | 1만9000원

스웨덴이 복지국가의 싹을 틔운 것은 세계가 대공황에 빠진 1930년대였다. 공황이 시작되던 1929~1932년 스웨덴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3%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1932~1934년에는 10%로 치솟았으며 1936~1937년에는 11%를 기록했다. 이후 스웨덴은 복지국가 모델을 현실화시켰으며 수십년간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선도했다. 대공황기 스웨덴 경제의 급격한 회복을 놓고 여러 해석이 제기됐지만, ‘세계 최초로 케인스주의적인 경기 부양책을 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스웨덴의 기적’ 중심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가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을 설계한 사상가이자 이론가였다. 대공황 때부터 1949년까지 17년간 재무장관직을 맡아 스웨덴 경제정책을 입안·추진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1932년 총선 당시의 스웨덴 사민당 포스터. 사민당은 당시 총선에서 41.7%의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고, 이후 1976년까지 44년 동안 장기 집권한다.l 출처 ; 경향DB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전망을 제시해온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쓴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는 비그포르스의 생애와 사상을 재구성하며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추적한다.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직업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년기에 독일 계몽철학 등 인문주의 전통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던 그에게 산업화의 모순은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근거는 물질주의에 기반한 계급의식도,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도 아니었다. 그는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해석했으며, 그의 분노의 이면에는 사랑과 연대를 통한 공동체의 꿈이 잠재해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사회문제 해법이 처음 공개된 것은 1908년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논쟁에 휩싸인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당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비그포르스에게 사회민주주의의 지향과 목표를 정리해 줄 것을 요구했고, 비그포르스는 이 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정리하며 사민당의 이론적 토대를 제시했다.

비그포르스 사상의 핵심은 ‘잠정적 유토피아’로 요약된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비그포르스는 구성원들이 지향해야 할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급진주의도, 실현불가능한 꿈도 아니었다. 


비그포르스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문제를 포착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우리는 몇십년, 몇백년 후에나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낙원이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 ‘잠정적 유토피아’론의 생명력은 그것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1919년 비그포르스는 ‘예테보리 강령’을 발표한다. ‘잠정적 유토피아’를 사회복지에 적용하고자 했던 실천강령이다. 이로써 그는 이론가·사상가에서 복지 설계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이 강령에서 산업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보편적 사회복지 정책을 제시했다. 이 강령은 뒷날 비그포르스가 재무장관으로서 추진한 ‘나라 살림의 계획’으로 이어졌으며 스웨덴 특유의 선별적 경제정책,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보편적 복지정책을 탄생시켰다.

그간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국가의 대안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말과 당나귀에서 태어난 노새가 생식 능력이 없는 것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튀기’인 사회민주주의가 산업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저자가 ‘철 지난’ 사회민주주의 체제인 스웨덴식 복지모델과 그 설계자를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허우적대는 한국 사회의 대안체제를 모색해보겠다는 취지에서다. 최근 한국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복지논쟁’에 시사를 주고자 하는 뜻도 담겨 있다. 

“복지는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 문제이기 이전에 정치사상의 문제”라고 말하는 저자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을 마련하는 데 유효한 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조운찬